조피 도로테아 폰 뷔르템베르크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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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는 1759년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딸로 태어나, 러시아 황태자 파벨 1세와 결혼하여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황태자비 시절에는 남편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예카테리나 2세와의 갈등 속에서도 자선 사업과 문화 활동에 힘썼다. 파벨 1세가 암살된 후에는 황태후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건축과 예술을 후원하고 자선 및 교육 활동에 헌신했다. 그녀는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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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도로테아 폰 뷔르템베르크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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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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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 (Sophie Marie Dorothea Auguste Luise) |
출생명 | 뷔르템베르크 공녀 조피 도로테아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출생 | 1759년 10월 25일 |
출생지 | 슈테틴, 프로이센 왕국 (현재 폴란드 슈체친) |
사망 | 1828년 11월 5일 (69세) |
사망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겨울 궁전 |
매장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개종 전: 루터교) |
서명 | Marie Autograph.svg |
신분 | |
배우자 | 파벨 1세 (1776년 결혼, 1801년 사망) |
자녀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대공녀, 오스트리아 대공비 겸 헝가리 팔라티나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세자비 마리아 파블로브나 대공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뷔르템베르크 왕비 올가 파블로브나 여대공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네덜란드 여왕 니콜라이 1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
가문 | |
가문 | 뷔르템베르크 가문 |
분가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결혼 후) |
아버지 | 뷔르템베르크 공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
어머니 |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조피 폰 브란덴부르크-슈베트 |
러시아 황후 | |
칭호 | 러시아 황후 |
재위 기간 |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 |
대관식 | 1797년 4월 5일 |
대관식 장소 | 모스크바 우스펜스키 대성당 |
2. 생애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는 1759년 10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슈체친(현재 폴란드)에서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과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의 장녀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몽벨리아르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 언어와 학문에 능통했다.[2]
1776년, 러시아 황태자 파벨 페트로비치의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추천으로 파벨의 두 번째 아내 후보가 되었다. 베를린에서 파벨과 처음 만난 후 약혼했으며,[3]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았다.[4] 같은 해 9월 26일 파벨과 결혼하여 러시아 대공비가 되었다. 파벨의 어려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부부 관계는 초기에는 원만했으나,[5]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와는 점차 관계가 악화되었다. 특히 마리아가 낳은 두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데려가 양육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6] 이 시기 마리아는 파블롭스크 궁전을 꾸미는 데 몰두했다.
1781년부터 1782년까지 남편 파벨과 함께 "세베르니 백작 부부"라는 가명으로 서유럽을 여행하며 폴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방문했다.[7]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가치나 궁전을 하사받았고, 이후 여러 자녀를 더 낳으며 로마노프 왕가는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벨과 마리아는 가치나에서 비교적 고립된 생활을 했으며, 마리아는 파블롭스크 궁전을 가꾸고 자선 활동에 힘썼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파벨 1세가 즉위하자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후가 되었다. 황후로서 자선 기관 설립 및 운영, 여성 교육 등에 힘쓰며 점차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8] 그러나 파벨 1세 말년에 부부 관계는 안나 로푸히나의 등장 등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1801년 파벨 1세가 암살된 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잠시 스스로 여제가 되려 시도했으나 아들 알렉산드르 1세의 설득으로 포기했다. 황태후가 된 후에도 궁정에서 최고의 여성 지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9] 그녀는 자선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달리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5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유지했으며, 열 명의 자녀 중 다섯 명보다 오래 살았다. 말년에는 자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1828년 11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파블롭스크 궁전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후손들에게 보존되었다.
2. 1. 어린 시절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Sophie Marie Dorothea Auguste Luisede)는 1759년 10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슈체친(현재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독일식 이름은 조피 도로테에 폰 뷔르템베르크(Sophie Dorothee von Württembergde)이다.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이며, 어머니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이다. 그녀는 8명의 자녀 중 장녀였다. 1769년, 가족은 당시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영토였으며 오늘날 프랑슈-콩테 지방에 속하는 몽벨리아르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성으로 이주했다.[1] 가족의 여름 별장은 에튀프에 있었다.
몽벨리아르는 뷔르템베르크 가문 분가의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드나드는 문화 중심지였다. 아버지의 영지가 프랑스와 가까웠기에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조피 도로테아는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의 기술 연마에 열정적이었다. 16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수학과 건축에 능통했고,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구사했다. 프랑스식 에티켓으로 교육받았지만, 독일 부르주아적인 소박함도 지니고 있었다. 성격은 사려 깊고 체계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한결같으며 다정하다는 평을 받았다.[2] 16세 무렵의 그녀는 키가 크고 풍만한 몸매에 발그레한 뺨을 가졌으며 밝은 성격을 지녔으나, 근시가 심했고 체중이 쉽게 느는 경향이 있었다.[2]
1773년,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미래의 파벨 1세가 될 파벨 페트로비치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된 15명의 독일 공주 중 한 명이었으나, 당시 14세가 채 되지 않아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대신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 루이제 공녀(러시아명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가 황태자비로 선택되었다. 이후 조피는 빌헬미나의 오빠인 헤센의 루트비히 1세 대공과 약혼했다.
그러나 1776년 4월 26일, 황태자비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가 첫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즉시 자신의 조카손녀인 조피를 파벨의 두 번째 아내로 강력히 추천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여제 또한 이 제안을 매우 반겼는데, 조피가 자신과 비슷한 교육 배경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름(조피)과 출생지(슈체친)까지 같았기 때문이다. 조피의 어머니는 과거 러시아 황족들의 불행한 운명을 떠올리며 슬퍼했지만, 정작 조피는 새로운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것에만 집중하겠다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이전 약혼자였던 루트비히 1세에게는 위자료로 1만러시아 루블이 지불되었다.
조피와 파벨은 베를린에서 열린 공식 만찬에서 처음 만났다. 조피는 파벨의 진지한 성향을 파악하고 첫 대화에서 기하학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음 날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매우 만족한다. 대공은 더없이 친절하다. 사랑하는 신랑이 나를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로 인해 매우, 매우 행복하다."라고 썼다. 파벨 역시 조피에게 매우 만족하여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낸 편지에 "제가 꿈꿔왔던 그런 배필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몸매가 좋고, 지적이며, 재치 있고, 전혀 수줍어하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3]
두 사람은 1776년 7월 23일 베를린에서 공식적으로 약혼했다. 조피는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러시아식 이름인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받았다. 결혼식은 1776년 10월 7일에 거행되었다.
2. 2. 황태자비 시절



1773년, 조피 도로테아는 러시아의 황태자 파벨 페트로비치의 신붓감 후보 중 한 명이었으나, 당시 14세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대신 파벨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의 딸 빌헬미네 폰 헤센-다름슈타트(러시아명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와 결혼했다. 조피는 1776년 4월, 빌헬미네의 오빠인 루트비히와 약혼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26일, 황태자비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가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종손녀인 조피를 새로운 황태자비 후보로 강력히 추천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여제 또한 조피가 자신과 교육 배경, 이름(조피), 출생지(슈체친)까지 같다는 점에 만족하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피는 러시아 황후가 될 기회를 얻어 기뻐했으며, 새로운 나라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전 약혼자였던 루트비히에게는 약혼 파기에 대한 보상으로 1만러시아 루블이 지급되었다.
조피와 파벨은 1776년 7월 23일 베를린에서 처음 만나 약혼식을 올렸다. 조피는 파벨의 진지한 성향을 파악하고 첫 만남에서 기하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좋은 인상을 주려 노력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매우 만족합니다. 대공은 더없이 친절합니다. 사랑하는 신랑이 저를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로 인해 매우,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적었다. 파벨 역시 조피에게 만족감을 표하며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게 "제가 꿈꿔왔던 그런 배필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몸매가 좋고, 지적이며, 재치 있고, 전혀 수줍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3] 조피는 곧 파벨과 깊은 사랑에 빠졌으며,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숭배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5]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조피는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마리아 표도로브나'''(Мария Фёдоровнаru)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받았다.[4] "황족 전하"라는 칭호와 함께 러시아 대공비의 작위를 얻었으며, 결혼식은 1776년 9월 26일에 거행되었다. 마리아는 파벨의 까다롭고 때로는 폭군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을 유지했으며, 그녀의 차분함과 인내심은 파벨의 극단적인 성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황태자비로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고, 하루 종일 정장을 입고 지내는 등 엄격한 궁정 생활을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요구했다. 심지어 사망한 전임 황태자비 나탈리아의 옷과 슬리퍼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 초기 예카테리나 2세는 마리아에게 매료되어 "당신에게 고백하는데, 나는 이 매력적인 공주에게 반했습니다. 말 그대로 반했습니다. 그녀는 정확히 바라는 모습입니다. 요정의 모습, 백합과 장미의 안색,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피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감사할 줄 알고, 상냥함, 친절함, 순수함이 그녀의 얼굴에 비칩니다."라고 친구에게 쓸 정도였다.[6]
그러나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남편 파벨의 편에 섰고, 이는 예카테리나 2세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1777년 12월 첫 아들 알렉산드르 1세를, 1779년 4월 둘째 아들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낳았을 때, 예카테리나 2세가 아이들을 직접 양육하겠다며 데려가 버린 사건은 마리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리아와 파벨은 일주일에 한 번만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 일로 마리아의 시어머니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아들들을 빼앗긴 마리아는 예카테리나 2세가 첫 손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선물한 파블롭스크 궁전을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는 데 몰두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파블롭스크 궁전은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1783년, 마리아는 첫 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낳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이를 축하하며 방이 600개나 되는 가치나 궁을 선물했다. 그러나 남편 파벨의 예민한 성격과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끊임없는 감시와 압박 속에서 가치나 궁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마리아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남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 노력했으며, 파블롭스크 궁전을 가꾸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복지 활동에도 힘썼다.
2. 3. 유럽 여행 (1781-1782)
정치적 문제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파벨과 마리아는 예카테리나 2세의 허락을 받아 서유럽 여행을 떠났다. 1781년 9월, 부부는 "세베르니 백작 부부"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14개월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특히 파리 방문은 부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곳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 루이 16세는 파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마리아 앞에서 다소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부드러워졌고, 여왕은 마리아에게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화장품 세트를 선물하기도 했다.[7]
오스트리아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를 만났다. 요제프 2세는 마리아를 남편 파벨과 비교하며 그녀의 뛰어남을 인정했다. 이탈리아 방문 중에는 부부의 깊은 애정이 드러나는 일화도 있었다. 파벨이 공공장소에서 아내에게 자주 입맞춤을 하여 동행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마리아는 고향인 뷔르템베르크에 들러 부모님을 만났다. 1782년 말, 긴 여행을 마친 부부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2. 4. 황후 시절
1796년 11월,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자 20년 넘게 황태자비로서 그림자 속에 머물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후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 생전에는 남편 파벨 1세조차 국정에서 배제되었기에 마리아 역시 정치에 관여할 기회가 없었으나, 남편이 즉위한 후 점차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으며[8], 이는 대체로 파벨 1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영향력을 친구를 돕거나 정적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황후로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러시아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자선 기관을 세우는 등 사회 활동에 힘썼다. 그녀가 세운 자선 기관 중 일부는 러시아 혁명 시기까지 존속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척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남동생 알렉산더를 러시아로 초청한 것이 그 예이다.
황후가 된 이후에도 파벨 1세와의 관계는 예전처럼 가깝지는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과 의존, 온정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파벨 1세 통치 말년에 이르러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798년 마리아가 열 번째 아이를 낳은 후, 파벨 1세는 19세의 안나 로푸히나에게 빠져 그녀를 공공연한 애첩으로 삼았다. 파벨 1세는 이 관계가 부성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1801년 3월 12일, 즉위한 지 4년 4개월 4일 만에 파벨 1세는 궁정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남편이 살해된 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전례를 따라 스스로 여제로 즉위하려 시도했다. 그녀는 자신이 파벨 1세와 함께 공동으로 즉위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으나, 아들 알렉산드르 1세를 비롯한 대다수 정파의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며칠 만에 황위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장남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했지만,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태후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녀는 궁정에서 최고의 여성 지위를 누렸으며, 공식 석상에서는 종종 황제인 아들의 팔을 잡고 황후 엘리자베스 알렉세예브나보다 앞서 걷기도 했다. 황태후가 재위 중인 황제의 아내보다 우선시되는 이러한 관행은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러시아 궁정에 도입한 독특한 것이었으며,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황후의 불만을 샀다. 초기에는 아들이 방문할 때마다 파벨 1세가 암살당할 당시 입었던 피 묻은 잠옷을 꺼내 놓으며 아들에 대한 침묵의 비난을 표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자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다. 황태후로서 마리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전통을 따라 가슴에 훈장을 달고 군복 차림으로 군대 사열에 참석하기도 했다.[9]
그러나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아들 알렉산드르 1세의 정치 노선, 특히 나폴레옹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자신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와 나폴레옹의 혼담이 거론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무산시키고, 대신 네덜란드의 빌럼 왕자와 혼인시켰다.
2. 5. 태후 시절
1801년 3월 남편 파벨 1세가 암살되자,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전례를 따라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가 되려 했다. 그녀는 자신이 파벨 1세와 함께 즉위했음을 근거로 내세웠으나, 지지 세력이 없었고 아들 알렉산드르 1세의 설득으로 며칠 만에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8] 초기에는 아들이 방문할 때마다 암살당한 남편이 입었던 피 묻은 잠옷이 든 상자를 그들 사이에 놓아두며 침묵으로 비난하기도 했으나, 점차 관계는 개선되었다.새롭게 즉위한 알렉산드르 1세는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궁정에서 가장 높은 여성 지위를 부여했다. 공식 석상에서 황후 엘리자베스 알렉세예브나보다 앞서 황제의 팔을 잡고 등장하는 등[9] 황태후로서의 특권을 누렸으며, 이는 러시아 궁정에서 마리아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관례였다. 그녀는 상당한 수입을 바탕으로 파블롭스크 궁전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11]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고위 인사들의 필수 방문지가 되었다. 이는 실내 관리관들에 둘러싸여 격식을 갖춘 그녀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소박했던 알렉산드르 1세 부부의 궁정 생활과 비교되었다.[9] 또한, 예카테리나 2세의 전통을 따라 가슴에 훈장을 달고 군복 차림으로 사열에 참석하기도 했다.[9] 그녀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자와 같은 가난한 친척들을 돕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나폴레옹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아들이 나폴레옹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격렬하게 반대했다.[17] 그녀의 궁정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 내 반(反)나폴레옹 정서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자신의 막내딸 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에게 청혼했을 때, 마리아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18] 결국 무산시키고 딸을 네덜란드의 빌럼 왕자와 결혼시켰다.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는 열정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들과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고 소원해지기도 했다.
2. 6. 자선 및 교육 활동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남편 파벨 1세가 즉위하자,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후로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록 남편 생전에는 정치에 직접 관여할 기회가 제한적이었으나,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8] 특히 자선 및 교육 분야에서 그녀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1797년 5월, 파벨 1세는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국립 자선 단체 감독을 맡겼다. 그녀는 이 역할을 맡아 고아원 운영 방식 개선에 힘썼다. 무분별한 입소를 제한하고 예비 위탁 부모에 대한 철저한 검사를 도입하여 고아 유입을 줄이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고아원 내 사망률은 크게 감소하여, 1826년에는 연간 사망률이 15%까지 낮아졌다.[10] 이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개선이었다.
남편 파벨 1세가 암살된 후에도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태후로서 제국의 모든 자선 단체를 계속 관리했으며, 대출 은행도 감독했다.[11] 그녀가 관리하는 기관들의 총 자산은 1828년까지 3.59억러시아 루블을 넘어섰는데, 이는 당시 모스크바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10]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후견인 위원회를 통해 전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 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주택들은 1820년대에 다양한 계층의 약 8,000명에게 거처를 제공했다.[12]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기존 자선 기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에 나섰다. 기관 규모를 효율화하고, 어린이와 성인 입주자를 분리했으며, 특히 어린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어린 거주자들을 위한 독립 고아원을 새로 설립했다. 대표적인 예가 1830년에 십 대 고아들을 위해 세워진 모스크바 공예 대학(Moscow Crafts College)으로, 이 학교는 오늘날 바우만 모스크바 국립 기술 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12] 고아원에서는 "소년을 위한 라틴어 수업"이나 "소녀를 위한 산파 수업"과 같이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
또한, 우연히 청각 장애인 소년을 만난 것을 계기로 1807년 러시아 최초의 농학교를 설립했다.[13] 그녀는 재능 있는 인재를 지원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 파산 위기에 처한 어머니를 도운 맹인 음악가 샬롯 쇠엘링의 경력을 후원하기도 했다.[13]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관리한 고아원들은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발하여 전문적인 직업 교육을 제공했으며, 세르게이 솔로비요프, 알렉산드르 보스토코프, 바실리 클류체프스키, 니콜라이 브누아, 바실리 베레시차긴과 같은 저명한 학자 및 예술가들이 교사로 참여했다.
이 외에도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러시아 최초의 여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 교육에도 기여했다. 그녀가 설립하고 지원한 많은 자선 및 교육 기관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존속하며 러시아 사회에 기여했다.
2. 7. 건축 및 예술 후원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뛰어난 안목을 지녔으며, 건축, 수채화, 조각, 상아와 호박 공예품 디자인, 원예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2] 그녀는 파블롭스크, 가치나, 차르스코예 셀로, 겨울 궁전, 그리고 에르미타주 미술관 등 여러 궁전의 개조와 가구 비치를 직접 지도했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택들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남편 파벨은 함께 파블롭스크 궁전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바젤 근처 에튀프에서 자란 궁전을 떠올리게 하는 소박한 구조물을 짓기를 원했다.[14] 1781년 서유럽 여행 중에는 부부가 궁전 개조에 대한 세부적인 그림, 계획, 메모를 주고받기도 했다.[15] 그녀는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로시를 초빙하여 2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도서관을 재설계하도록 했다.[16]
1801년 남편 파벨이 사망한 후, 가치나 궁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소유가 되었다. 그녀는 유럽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1809년 "겨울 체류를 대비"하여 궁전 내부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하고 변경했다.
3. 인물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러시아 역대 황후 중 가장 키가 컸으며, 심한 근시였다.[2] 16세 무렵에는 풍만한 몸매와 발그레한 뺨을 가진 모습이었으나, 다소 체중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2]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요정의 모습, 백합과 장미의 안색,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피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감사할 줄 알고, 상냥함, 친절함, 순수함이 그녀의 얼굴에 비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6]
그녀는 황실의 엄격한 법도나 에티켓을 꺼리지 않고 오히려 즐겼으며, 항상 몸가짐이 단정했다. 러시아 황실 인물로서는 드물게 검소하고 절약 정신이 투철하여, 남편 파벨의 첫 번째 아내였던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의 옷을 물려 입기도 했다.[28][2] 주변에서는 그녀를 사려 깊고 조직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변함없는 성품에 다정함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했다.[2] 차분한 성격과 인내심은 까다롭고 때로는 폭군적인 성격의 남편 파벨 1세를 대하고 그의 극단적인 면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그녀는 친구에게 "나의 사랑하는 남편은 완벽한 천사이며, 나는 그를 넋을 잃을 정도로 사랑합니다."라고 쓸 정도로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5]
예술을 사랑하여 음악, 미술, 원예 등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어린 시절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아 16세에는 수학과 건축에도 정통했으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2] 하프시코드 연주에도 능숙했으며, 파블롭스크 궁전에서는 문학 살롱을 운영하며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 우화 작가 이반 크릴로프, 역사가 니콜라이 카람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프랑스식 에티켓으로 양육되었지만, 독일 부르주아의 소박함을 지니고 있었다.[2]
4. 자녀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러시아 제국의 파벨 1세와의 결혼 생활 동안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알렉산드르 1세 | 1777년 12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러시아 제국 황제. 바덴의 루이제(엘리자베트 알렉세예브나)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 1779년 4월 27일 | 1831년 6월 27일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안나 표도로브나)와 결혼했으나 이혼. 이후 요안나 그루진스카와 귀천상혼하여 제위 계승권 포기. 후사 없음. |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 1783년 8월 9일 | 1801년 3월 16일 |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헝가리 총독)와 결혼. 딸 하나를 낳았으나 사산. |
엘레나 파블로브나 | 1784년 12월 24일 | 1803년 9월 24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세습 대공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둠. |
마리아 파블로브나 | 1786년 2월 16일 | 1859년 6월 23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둠. |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 1788년 5월 21일 | 1819년 1월 9일 | 올덴부르크 공작 게오르크와 결혼하여 2남을 둠. 사별 후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 국왕과 결혼하여 2녀를 둠. |
올가 파블로브나 | 1792년 7월 22일 | 1795년 1월 26일 | 요절. |
안나 파블로브나 | 1795년 1월 18일 | 1865년 3월 1일 | 네덜란드의 빌럼 2세 국왕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둠. |
니콜라이 1세 | 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2일 | 러시아 제국 황제.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녀(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둠. |
미하일 파블로비치 | 1798년 2월 8일 | 1849년 9월 9일 |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공녀(엘레나 파블로브나)와 결혼하여 5녀를 둠. |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사려 깊고 다정한 어머니였으나,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는 장남 알렉산드르 1세와 차남 콘스탄틴 파블로비치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손에서 직접 양육하겠다며 데려갔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아들들과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날 수 있었고, 예카테리나 2세에게 깊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19] 그럼에도 마리아는 모든 자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특히 남편 파벨 1세 사후에는 딸들의 미래와 어린 아들들(니콜라이 1세, 미하일 파블로비치)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19] 그녀는 손자인 미래의 알렉산드르 2세의 초기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리아는 예카테리나 2세가 두 맏아들에게 제공했던 교육을 넘어서고자 했지만, 어린 아들들에게는 최고의 교사를 선택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5. 유산
50세가 넘어서도 젊음을 유지했던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튼튼한 체질 덕분에 열 명의 자녀 중 다섯 명, 심지어 장남과 그의 아내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녀는 셋째 아들 니콜라이 1세의 즉위를 지켜보았다. 1822년,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는 개조된 옐라긴 궁전으로 이사했으며, 1828년 11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자녀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비록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대공녀는 예외였지만, 다른 딸들의 이름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후대의 러시아 황후들 또한 그녀를 존경하며 롤 모델로 여겼다.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오랫동안 거주하며 주요 흔적을 남긴 파블롭스크 궁전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보존되었다. 궁전은 먼저 막내아들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상속되었고,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콘스탄티노비치 가문이 대대로 물려받아 관리하며 후손들을 위한 일종의 가족 박물관처럼 유지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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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avlov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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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the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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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respondenzen und Unterlagen von Zarin Maria Feodorowna - Briefwechsel mit Familienangehöri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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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zog Friedrich Eugen (1732-1797) - Briefwechsel des Herzogs mit dem kaiserlichen Hause von Russland, 1776-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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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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